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는 2003년에 개봉한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하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작으로 거론되기도 하였고, 제작 기간이 무려 3년에 달하는 대표작입니다. 영화 속에는 잔인한 장면이 은근히 많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본성’을 잘 표현해서인지 놀랍게도 전체관람가로 개봉했던 영화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대표작 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세련된 화면구성과 앞선 생각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무섭고도 아름다운 영화에서 ‘모노노케 히메’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지브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작인 이유를 들여다보겠습니다.
1. 재앙이 오는 이유
영화의 장면은 14세기 무렵 일본의 동쪽 외진 곳에 독특한 복장에 큰 뿔이 달린 사슴을 타고 활을 쏘는 민족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됩니다. 일본의 소수민족 아이누를 모델로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낸 가상의 부족인 ‘에미시’ 일족입니다.
주인공 아시타카라는 청년은 숲을 다니다가 마을에 다가오는 위협을 감지합니다. 거대한 줄기나 밧줄같이 생긴 이 괴생명체는 어느 산의 산신인 멧돼지 ‘나고’입니다. 타타라 마을에서 쏜 총알을 맞고 ‘재앙신’이 되어서 주변에 죽음을 뿌리며 에미시 마을까지 도달했습니다. 주인공의 활약으로 재앙신의 습격은 막아냈지만, 아시타카의 팔에는 저주가 남아버렸습니다.
재앙신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마을의 무녀 할머니는 재앙신의 안에서 나온 쇳덩이가 산신인 멧돼지를 재앙신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타카는 이 쇳덩이의 정체를 밝히고 저주를 풀기 위해 마을을 떠나 서쪽으로 향합니다. 아시타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출신이지만 우연히 만난 스님의 도움으로 쉽게 타타라 마을에 도착합니다. 재앙신이 된 나고의 몸에서 나온 쇳덩이가 타타라 마을에서 쏜 총알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타타라 마을 옆, 사슴 신의 숲에서 만난 늑대 신 ‘모로’는 나고가 총알 때문에 재앙신이 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재앙신이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동물 신을 공격해서 라거나 자연을 거스르는 무기를 만들어서라든지 문명과 자연을 대립시키는 이야기를 하거나 과학기술을 비난하는 대목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고’가 재앙신이 된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멧돼지 산신에게 총을 쏘는 인간의 행동은 괜찮은 것일까요?
모노노케 히메 속 인간은 세 개의 세력이 보입니다. 철을 생산하는 ‘타타라 마을’,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마을, 동물들의 편을 드는 산, 사무라이 마을은 전통적인 구세력을 보여줍니다. 아시타카가 타타라마을로 향하는 도중 전쟁을 하는 한 무리의 사무라이들을 만납니다.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을 아시타카가 활로 저지합니다. 타타라 마을은 개발과 발전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여자와 한센병 환자처럼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약자들이 힘을 모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냅니다. 진보적이고 기술 위주의 집단입니다.
산은 동물과 자연생태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주변에 사람은 없고 늑대, 성성이, 멧돼지 숲의 정령인 딸각거리는 ‘코다마’들까지 자연을 인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죠. 특히나 ‘산’은 자연보호를 넘어서 인간을 혐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급진적인 환경운동을 표현한다고 느꼈습니다. 자연의 모든 것을 재료로 집어삼키는 발전도 문명을 박살 내고 인간을 제거하려는 급진적 행동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세대 세력도 각자의 입장은 있지만, 어느 하나 온전히 옳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세 집단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가 멧돼지 신 ‘나고’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슴 신은 ‘나고’는 죽게 놔뒀으면서 ‘아시타카’는 살려주었습니다. 그 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2. 사슴 신의 역할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외형으로만 본다면 자연을 표현하는 동물들과 문명을 표현하는 인간들의 대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물 중에서도 어떤 힘, 지능, 능력을 지닌 존재들만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인간과 영역 다툼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늑대, 멧돼지, 성성이들은 자신들끼리도 숲의 주인을 들먹이며 싸우죠. 성성이는 산해경에 나오는 신수의 일종입니다. 인간의 얼굴과 짐승의 몸을 가지고 있고,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어서 하늘과 교감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존재입니다. 한때는 중국 남부에도 살았던, 아시아의 하나뿐인 유인원인 오랑우탄이 성성이의 모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오랑우탄은 수화를 배우면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지능이 매우 높은 동물입니다. 말레이시아의 전설에서는 원래 인간의 말을 할 줄 알았지만, 말을 하면 사람들이 괴롭힐 것 같아 입을 닫고 숲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할 정도로 지능이 높다고 합니다.
이렇듯 성성이는 사람과 상당히 비슷한 존재입니다. 털이 나 있고 나무가 많은 숲에서 살 뿐입니다. 저는 늑대 모로 일족이나 멧돼지들, 성성이 역시 인간과 종족이 다를 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존재로 보였습니다.
즉 이들은 자연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기 적합한 환경을 위해서 나무를 심고 인간을 쫓아내는 영역 다툼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철과 불만 다루지는 않습니다. 먹기 위해서 과일나무를 심고 밭을 경작합니다. 각자의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택할 뿐 인간과 동물 모두가 자연의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싸움은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자연의 섭리에 맞는 행위이기 때문에 사슴 신은 누구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다가오면 받아들이는 것 역시 자연의 섭리입니다. 옷토코누시가 인간과 싸우기 위해 죽음을 거부하자 몸에서 나쁜 기운이 자라나며 재앙신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슴 신은 그런 옷토코누시를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재앙신으로 변한 그의 생명을 거둬갑니다. 자연의 섭리대로 말입니다. 반면에 아시타카는 이들 사이를 오갑니다. 감독의 마음을 담은 ‘중재자’인 것입니다. ‘산’이 타타라 마을의 지도자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 홀로 마을에 뛰어들어 싸울 때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자기 몸에 남은 저주를 보여주면서 원한과 증오의 결과가 끔찍함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저주의 힘으로 두 사람을 제압한 아시타카는 산을 데리고 마을을 떠나던 중, 총에 맞아 가슴이 뚫리는 치명상을 입습니다. 저주의 힘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아시타카를 살리기 위해 산이 그를 사슴 신에게로 데려갑니다. 아시타카는 멧돼지 신들과 다르게 다른 이의 의지로 사슴 신에게 당도합니다. 스스로 죽음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사슴 신이 아시타카를 살려준 이유는 그의 행동이 자연의 섭리에 맞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3. 자연과 신화
인간을 쫓아내고 숲을 지키려는 ‘산’은 급진적인 환경운동가처럼 보입니다.
마치 “지구를 살려야한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 자연을 이해하고 순응하는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자연 밖의 존재로 보는 건 오만한 생각이라는 의견들이 많죠. 이것이 주인공 ‘아시타카’의 입장이며 감독이 말하려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 속 동물신들은 산마다 산신이 있다는 아이누의 신화와 하얀 늑대 설화인 ‘레타르 세타’ 이야기를 모티브로 재창작된 존재들입니다. 옛부터 사람들은 크고 강한 야생동물들에게 자신들만의 해석으로 역할과 의미를 부여했고 이를 통해 포식자나 천적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집단의 결속력을 유지했습니다. 동물의 행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숲의 주인을 사람도 동물들도 모두 ‘사슴 신’이라고 부르죠. 사슴들과 같이 걸어 다니기도 하고 머리의 뿔이 사슴뿔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사슴 신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존재의 정체가 무엇이든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려 애쓴 이름입니다. 반면에 ‘다이다라봇치’라는 다른 이름도 있는데, 스님은 밤이 되면 사슴 신이 다이다라봇치로 변한다고 합니다. 거대한 반투명의 거인. 낮에는 생명의 신, 밤에는 죽음의 신이 되는데 ‘다이다라봇치’는 일본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거인입니다.
재미로 땅을 파 호수를 만들고 그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죠. 지진, 해일, 화산 등 땅이 사라지고 산이 생기는 거대한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 없던 고대인들은 ‘거인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악이 없는 순수한 행동인 거죠. 사슴 신은 자연의 섭리 그 자체입니다. 죽어가는 아시타카를 살리기 위해서 그를 호수에 데려다 놓은 산은 머리맡에 나뭇가지를 꽂습니다.
사슴 신은 아시타카가 아니라 나뭇가지에 숨을 불어넣고 생명을 거두어갑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죽음에서 새 생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대가로 죽어가던 아시타카가 살아난 것입니다. 산은 대자연의 순환이라는 섭리를 이해한 인물 같습니다. 반면에 나고나 옷토코누시는 그 커다란 덩치와 생명의 그릇을 아무 대가 없이 공짜로 채워주길 바란 셈입니다. 그러니 재앙신이 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4. 재앙신을 피하는 방법
이 작품이 <자연의 섭리>를 강조하는 것은 맞지만, 무조건 과학의 발전을 거부하고 초기 농경사회로 돌아가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님을 비롯한 인간들은 사슴 신의 머리에 생명의 힘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밤의 모습인 '다이다라봇치'는 '죽음'이라 여기고 낮의 모습인 '사슴 형태의 머리'를 얻으려고 합니다. 밤이 찾아오고 사슴 신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다급히 총을 쏴 사슴 신의 머리를 잘라냈습니다. 머리는 사슴인 채로 남았지만 몸은 다이다라봇치가 되었고 머리가 잘린 부분에서 검은 액체가 퍼져 나가며 살아있는 것들을 모두 죽이기 시작합니다.
낮과 밤에 따라 모습이 변하는 사슴 신은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자연을 의미할 뿐 그것을 되돌리는 힘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사슴 신의 머리를 가지면 영생을 얻는다는 건 '무지개를 따라가면 그 끝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과 비슷한 <허상>입니다. 머리를 잘라내 생명의 힘만 취하려고 하는 건 밤과 낮, 죽음과 생명이라는 섭리를 거부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래서 목이 잘린 부위에서 퍼져나가는 검은 점액질은 재앙신의 재앙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의 흐름을 깨는 섣부른 행동을 한 결과입니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정확한 연구나 안전 평가 없이 사용되어 수많은 질병과 장애를 유발한 물질들과 심각한 오염을 만들어내는 핵무기와 핵폐기물은 부족한 이해의 결과물이죠. 감독은 아시타카를 디자인하면서 ‘내 일생일대의 미형을 그리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아시타카는 극 중에서 가장 바른길을 걷는 인물입니다.
감독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어떤 캐릭터보다도 두드러지게 그리고 싶어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수려한 외모의 주인공 아시타카는 ‘중재자’입니다. 산과 타타라 마을은 물론이고 동물 신과 모든 존재를 서로 싸움을 멈추게 하려고 애씁니다. 아시타카는 마을에 재앙신을 불러온 총알을 가지고 진실을 알기 위해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마을이나 자신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대화하려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영화가 제시하는 방향 역시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동안 치열한 생존의 투쟁을 해왔으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거의 모든 존재를 굴복시켰습니다. 생존에 급급한 지경을 벗어났으니 상대를 더 자세히 알고 이해하는 길로 가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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